투기꾼 잡으려다 농사꾼 잡는 '농지 조사'
李 지시로 3개월간 전국 전수조사
춘천=정성원 기자, 안동=권광순 기자
이천=김은진 기자, 보성=진창일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6.09.18.

농지 조사원들이 경북의 한 농지를 살펴보고 있다.
불법 임대차 등 농지법 위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14년 동안 땀 흘려 농사지은 논인데 땅 주인이 갑자기 돌려달라고 해요.
당장 내년부터 농사지을 땅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날벼락이 따로 없네요.”
경기 이천에서 남의 논 2900㎡(약 900평)를 빌려 벼농사를 짓는 이모(54)씨는 최근 땅 주인에게서
“직접 농사를 지을 테니 논을 돌려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씨는 별도 계약서 없이 매년 임차료 90만원을 내고 농사를 지어왔다.
이씨는 “정부가 전국 농지를 대상으로 전수 조사를 벌이니 땅 주인이 불안해 죽겠다고 한다”며 “
투기꾼 잡겠다는 정책이 논에서 먹고사는 애꿎은 임차농을 잡는다”고 했다.
지난 5월 정부가 농지 투기를 막겠다며 농지 전수 조사에 착수한 뒤 농촌 곳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후폭풍이 나타나고 있다.
이씨처럼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임차농은 땅 주인에게서 “직접 경작할 테니 땅을 돌려달라”는 통보를 받고
, 농사를 그만두려는 고령 농민과 농지를 상속받은 도시 주민들은 “땅을 팔고 싶어도 사겠다는 사람이 없다”고 호소한다.
농지 거래가 위축되고 가격도 떨어지면서 농지를 담보로 돈을 빌려준 지역 농협에서는 대출 부실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헌법과 농지법상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에 따라 농사를 짓는 사람이 농지를 소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른 사람에게 농지를 빌려주는 건 법이 정한 경우에만 허용된다. 이를 어기면 농지를 처분하라는 명령을 받을 수 있다.
처분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매년 땅값의 25%를 이행강제금으로 내야 한다. 문제는 법과 농촌 현실 사이의 간극이다.
농촌에서는 고령으로 농사를 짓기 어려워진 땅 주인이나 농지를 물려받은 자녀가 이웃 농민에게 농사를 맡기는 일이 적지 않다.
전수 조사가 시작되면서 투기와 무관하게 오랫동안 이어져 온 임대차 관행까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는 17일 “현장의 불안과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당정이 협의해 구체적인 전수 조사 조치 방향과 계획을 마련하고 추석 전에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아파서 논 맡겼는데 투기꾼? 농사 짓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
이번 전수 조사는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월 국무회의 때 지시해 시작됐다.
이 대통령은 당시 “농지까지 투기 대상이 됐다”며 “필요하면 인력을 대규모로 조직해 전수 조사하고 농사를 짓는다고 땅을 사서 방치할 경우
매각 명령을 하는 방안도 검토하라”고 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5월 1996년 이후 취득한 농지 136만㏊를 대상으로 전수 조사에 착수했다. 예산은 670억원이다.
지난 7월 말까지 기본 조사를 마친 결과, 조사 대상 1013만필지 중 284만필지(27%)를 농지법 위반 의심 농지로 분류했다.
4필지 중 1필지꼴이다. 불법 임대차로 의심되는 사례가 21.1%로 가장 많았고 무단 휴경(11.6%), 불법 전용(9%) 등의 순이었다.
농식품부는 현재 위반 의심 농지를 대상으로 현장 확인 등 심층 조사를 벌이고 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연말까지 현장 확인을 거쳐 실제 법 위반 여부를 가릴 예정”이라고 했다.
그래픽=백형선
◇“팔고 싶어도 안 팔려”… 고령농·상속농 전전긍긍
경기 여주시 강천면에 사는 우모(68)씨는 최근 농지 1983㎡(약 600평)를 팔기 위해 수소문 중이다.
몸이 안 좋아 5년 전부터 이웃에 농사를 맡겼는데 올해 정부가 전수 조사에 나서자 처분하기로 한 것이다.
1평(3.3㎡)당 20만원 하던 땅을 처음엔 10만원에 내놨지만 팔리지 않았다.
최근에는 6만원까지 가격을 낮췄다고 한다. 우씨는 “이 나이에 팔리지도 않는 땅에서 농사짓는 척이라도 해야 하느냐”고 했다.
농지를 물려받은 사람들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다. 경북 영주에 사는 권모(61)씨는 25년 전 부친에게서 영양군 농지 9900㎡(
약 3000평)를 상속받았다. 집에서 차로 2시간 거리라 농지 옆에 사는 이웃에게 농사를 맡겼다.
권씨는 “수도권도 아니고 지방은 아무리 땅을 팔려고 해도 살 사람이 없다”며 “결국 국가에 기증해야 할 처지”라고 했다.
전남광주 보성의 논 1320㎡(약 400평)를 가진 김모(71)씨도 지난달부터 매수자를 찾고 있다.
남편이 숨진 뒤 직접 농사를 짓기 어려워 동네 주민에게 논을 맡기고 임차료로 쌀을 받고 있다. 김씨는 “농기계도 다룰 줄 모르고
몸도 성치 않은데 혼자 어떻게 농사를 짓겠느냐”며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 멀쩡한 땅을 내다 버려야 할 판”이라고 했다.
이런 가운데 농지 거래는 크게 위축된 상태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5~7월 기준 전국 농지 거래량은 2022년 12만6586필지에서
올해 7만8556필지로 4년 새 38% 줄었다.
올해 월평균 거래량도 1~4월 2만8529필지에서 전수 조사가 시작된 5~7월 2만6185필지로 8.2% 감소했다.
농지 가격도 하락세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올해 1~7월 전국 농지 실거래 가격은 1㎡당 평균 5만85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4% 떨어졌다. 올 2분기(4~6월)에는 전년 동기보다
8.1% 하락했다. 다만 농식품부는 농지 가격이 2021년 이후 계속 하락해 이를 전수 조사의 영향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2억7000만원 농지가 4600만원으로… 지역 농협도 비상
농지 거래 위축과 가격 하락은 농민 개인의 자산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농
지를 담보로 대출을 해준 지역 농협에서도 담보 부실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강원 춘천의 한 농지는 감정가가 2억7000만원이었지만 경매에서 거듭 유찰되면서 현재 최저 매각 가격이 4600만원대까지 떨어졌다.
이 농지를 담보로 1억9000만원을 빌려준 강원 지역 한 농협은 이 가격에 낙찰될 경우 대출 원금 중 1억4000만원가량을
회수하지 못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농협의 한 해 손익은 6억~7억원 수준이다.
이런 손실이 몇 건만 발생해도 경영에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게 농협 측 설명이다.
조합장 A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농지를 담보로 2억원을 대출해주면 1억8000만원 정도는 회수할 수 있었다”며
“요즘은 경매에서 농지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분위기”라고 했다. 경북 안동의 한 농협 조합장도 “농민들의 가장 큰 자산인 농지 가격이
계속 떨어지면 농지담보대출을 많이 취급한 지역 농협도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농지은행 위탁 80% 증가
전수 조사 이후 합법적으로 농지를 빌려줄 방법을 찾는 소유자도 크게 늘었다.
한국농어촌공사의 ‘농지은행’에 농지를 맡기면 공사가 실제 농사지을 사람에게 빌려준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지난 5월 18일부터 이달 2일까지 농지은행 위탁 건수는 3만1453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만7524건)보다
79.5% 증가했다. 경기는 1356건에서 4226건으로 212% 증가했고 강원은 92%, 경북은 74% 늘었다.
반대로 임차농의 피해 신고도 잇따랐다. 정부가 운영하는 임차농 보호 신고 센터에는 지난 5~7월 457건이 접수됐다. 경기 지역이 102건(22%)으로 가장 많았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임차농이 땅 주인을 신고할 경우 임대차 관계가 완전히 끊길 것을 우려해 신고를 꺼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 “농지 투기와 임대차 관행은 구분해 조치”
정부는 농지 투기와 농촌의 관행적인 임대차를 구분해 대응한다는 입장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관행적으로 형성된 임대차 관계에 대해선 처분보다 계도 위주로 조치할 계획”이라고 했다.
서진형 광운대 부동산법무학과 교수는 “수도권의 투기 농지와 소멸 위기에 놓인 농촌 지역 농지를 같은 잣대로 다뤄선 안 된다”며
“농촌에는 땅을 내놔도 살 사람이 없는 만큼 출구 대책도 필요하다”고 했다.
농민 반발이 커지자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21일 당정협의회를 열고 보완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고령농이나 상속농 등 농촌 현실을 어떻게 반영할지가 주요 안건이 될 전망이다.
野 "농촌 현실 모르는 정부… 탁상행정의 전형"
정부의 농지 전수조사에 대한 반발이 커지는 가운데 국민의힘은 17일 “정부가 선량한 농민들을 투기꾼으로 몰고 있다”며 공세에 나섰다. ‘정부가 ...

정성원 기자

권광순 기자
경북 22개 시군과 경북경찰청 등을 출입하고 있습니다. 279회 지역취재보도 부문 이달의 기자상, 기획탐사 보도 부문 2014 한국신문상, 한국지역언론보도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김은진 기자
경기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진창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