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새로운 반란은 남쪽에서 시작될 것으로도 인식되었다. 그래서 사건 관련자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떠돌았다. “국가에 반드시 변란이 있게 될 것이다. 비기에 왜인 같지만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온다는 말이 있다. 이는 부자(父子) 사이에도 전할 이야기가 아니니 절대로 전하지 말라/’피 역시 이 사건의 관련자인 이지목(李之穆)도 “비기[전후 맥락으로 보아서 『도선비기』임]에 왜인 같으면서도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온다.(似倭非倭自南而来)고 한 여덟 글자가 있다.” 고 주장하는 형편이었다.

1749년에 반란을 일으키게 될 사람들이 장차 왕으로 모시게 될 이란 곧 진인(眞人) 이었다. 이 진인에 대하여 이지서는 자기의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금산(金山) 붕계(凰溪)에 사는 정가(鄭哥)가 아들을 낳았는데 아침에 태어나서 저녁에는 말을 할 수 있었다. 키가 장대하여 삼척동자가 되었으므로-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부모가 밤에 그를 데리고 도망을 갔는데, 이것이 재작년(1746년)의 일이다. 지금은 거처를 알수 없지만 앞으로는 저절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제 또 이러한 진인출현설을 뒷받침하는 말이겠지만, "금산에 붕황이 있어 알을 낳았는데 하루 만에 그것이 저절로 터졌으니, 이는 실로 재변이다.” 라고도 말하였다.

대변란이 시작되었다고 믿었던 이지서 둥은 1748년 6월 충청도 문의에 내걸었던 패서 가운데 다가오는 난리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였다. “ [이웃 고율인] 회덕(懐德)도 그들[무신란의 잔여 세력]의 당여(黨與, 같은 무리라는 뜻)이고 회인(懷仁)도 그들의 당여이며 [충청] 병사(兵使)도 그들의 당여이다. 왜인 같지만 왜인이 아닌 사람들이 남쪽에서 오는데, [피난처로는] 물도 이롭지 않고 산도 이롭지 않고 궁궁(弓弓)이 이롭다. 이 고을[문의]에 대인(大人)과 명장(名將)이 있다.” 그 패서에는 또 “문의 고을의 백성들이 내달(음력 6월) 15일에 의당 어육(魚肉, 살상된다는 뜻〉이 될 것이니, 알아서 피하라” 라든가 또는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이는 인심을 동요시키기 위한 술책이 분명하였다.

그런가 하면 난이 발생할 경우 피난의 最適地로 인식되었던 궁궁에 대하여, 사건의 연루자인 오수만(吳遂萬)은 “궁궁은 활의 허리(弓腰)를 가리키는 것 같다. 따라서 구부러진 곳(劣處)에 숨으라는 말이다”라고 해석하였다. 한편 실록의 편자는 그러한 해석의 근거롤 “궁요(弓腰)는 속음(俗音)이 열(劣) 자의 뜻을 해석한 것과 같다”고 추측하였다. 이와는 달리 이지서는 궁궁을 광활하다는 뜻이다”라고 풀이하여,: 지리상 광활한 곳이 피난지로 적합하다는 의견을 보였다. 박민추 역시 궁궁율 '활활(閱関)”로 보아 사실상 이지서와 같은 입장을 취하 였다. 하지만 이지서의 아들 이영손은 궁궁(弓弓)은 고문(古文)의 유자(留字)라고 보기도 하였다 즉, 집에 머무르는 것이 최상책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이상적인 피난처인 궁궁의 의미에 대하여 사건 관련자들은 실로 다양한 해석율 제시하였다.(백승종, 273-2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