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독력이 낮아서 일일히 타이핑 다시 했다.>
증언자: 양강섭 씨 (남)
생년월일: 1954년생 (당시 27세)
당시직업: 대학생 (현재: 유인한의원 보좌관)
조사자: 이현주
조사일: 1989.1.23.
개요: 80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 6월 30일 구속돼 상무대 영창에 수감, 내란 중요 임무종사자로 1심에서 10년 형을 받고, 2심에서 5년으로 감형, 대법원에서 82년 4월 3일 잔형 면제로 출소했다. 그 후 전국민주회복협의회 총무간사, 국민운동본부 총무국장을 거쳐 현재 유인한의원 보좌관을 하고 있다.
전남대 총학생회 총무부장인 양강섭 씨다.
이 사람은 5.18 초기 주동자 중 하나였다.
총학생회 활동의 중심은 "어용교수퇴진" "비상계엄 혜제" "전두환 퇴진"이었다.
그러나 5월 3일, 농성을 해제하고 본격적인 싸움에 돌입했다. 더 이상 어용교수퇴진과 같은 자질구레 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비상계엄 해제"와 "전두환 퇴진"이 최대의 이슈였다.
민주화 성회 일정을 짜 각 단대별로 주동하는 일이 매일 되풀이 되었다.
5월 14일, 가두 진출을 놓고 내부에서 가두 시위 주동 문제로 논란이 벌어졌다. 학생회장이 당연히 나가야 된다는 측과 학교에 남아 뒷수습을 해야 한다는 측이 팽팽히 맞서다 회장이 직접 나서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55me, 5.18은 5월 3일부터 시작됐당께!
처음에는 단순히 어용교수에 대한 시위에서 갑자기 계엄철폐와 전두환 퇴진으로 구호가 바꼈다!
5월 14일에 학교를 벗어나서 가두행진을 해야겠다고 결정!
상원이 형이 전화로 화염병 제조 방법을 이야기하면서 신나에 모래를 섞으면 폭발성이 더 강하다고 전해줬다. 전화를 받고 집에 있는데 전화가 도청되었다면 내 거처가 드러났을 가능성이 있다는...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 화염병이 빠져선 안 되지!
화염병 제조법을 13일에 미리 배웠당께!
14일 밤부터 공수부대가 이동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학교 사수를 위해 농성에 들어갔다.
15일에도 전날과 똑같은 민족 민주화 대성회가 있었다.
그때부터 집행부 내부에서는 도청 접수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그냥 평범하게 민주화를 꿈꾸던 대학생들이 어떻게 된 일인지 공수부대 이동 정보까지 얻었다! 아!내가 첩보요원이다!
15일부터는 전남도청을 점거하지는 의견이 나왔당께!(계엄군 진입 전)
"계엄확대소식"
16일에도 도청 앞 집회는 계속되었다. 밤 늦게 횃불행진을 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가는 길은 밤에 어둠을 밝히는 횃불 같이 명명백백하다는 의미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횃불을 든 사람은 각각 네 사람이 보호를 했고 경찰들의 호위 아래 전남대생은 노동청-광고-산수동 오거리를 거쳐 도청에 다시 집결했다. 우리는 도청 앞 광장에서 5.16 군사 쿠데타를 응징한다는 의미의 화형식을 거행했는데 분수대 위에서 약간의 해프닝이 벌어졌다...
촛불시위? 우습구나. 광주는 횃불시위를 한다!
민주화의 불꽃을 피우기 위해서 화형식은 기본!
분명히 광주는 난리가 났을텐데도 방송에서는 제대로 보도를 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건 북한방송 밖에 없었다.
21일, 우리에게 도피처를 제공해준 사대 정정의 교수한테 전화가 왔다. 관현이 가명이 관수였는데 교수는 관수가 죽었다고 소문이 광주에 파다한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전화를 끝으로 전화마저 불통되었다.
대한민국의 방송과 계엄군은 믿을 수 없지만 북한 방송은 놓칠 수 없지!
날마다 죽을 맛으로 이북방송만 듣고 있었다. 희망이랄까, 낙관적인 소식은 단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시위에 불을 붙여놓고는 날마다 이북 방송 들으면서 응딩이를 숨겨놓은 게 바로 자랑스러운 전남대학생의 참 모습이랑께!
반응 좋으면 시리즈 간다.
출처: 전남대학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아카이브(http:www.openarchives.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