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복지는 인기영합주의가 아니다. 메시아적 통일소망주의 안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민주팔이 국회마피아가 만드는 문화가, 한국경제의 지속가능성을 좀먹는 주범-
과잉복지를 원하는 文化를 놔두고
국민에 책임의식 심던 시대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국민과 소통단절로
다음 선거 포기할 때만 가능
2000년 무렵 자유경제원의 김대중 공격용어가 ‘인기영합주의’였다. 좌익에 대한 무지와, 右尊左卑論이 섞인 것이다. 과연, 작금의 과잉복지가 인기영합주의였을까? 그렇지 않다. 국민의 요구다. 국민의 민중신학 문화 포위와 담쌓고 사는 보수 엘리트가, 그렇게 포획된 국민 대중의 염장지르기로 비춰질 수 있는 게 지금이다.
일제 36년 및 6.25 전쟁을 거친 연후의 자유민주체제의 소중함을 강조받던 문화 속에서는 없던 일이다. 지금은 2000년 6.15이후 보수정권이 됐던 진보정권이 됐던 ‘메시아적 통일 소망주의’로 국민을 포획하는 것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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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반공시대 |
민주화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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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국가수호 책임의식 강조 -개별주체 책임 속에 공동체 의식 |
개인(=이기주의) 긍정 -메시아적 통일소망주의 (책임의식 안녕!!) |
과거, 국가의타주의가 약간 있었다. 국가 이름으로 반공 블록이 커지는 바가 있었다. 지금은 그게 고스란히 ‘영웅정치인’(좌파진영은 개혁정치인)으로 옮겨 왔다.
게다가, 샤머니즘이 강한 한국에서 개인 긍정은 ‘책임의식 단절’ !!
그리고, 통일에 유토피아를 꼴아박음으로써 ‘책임의식 단절’을 구현했다.
즉, 민주화시대는 국민의 정치에 ‘무한 의타주의’만 가능하고, 단절은 보수와 단절만 있다.
1988년 KNCC 선언은 한국교회협의회 소속의 ‘토착화신학’을 긍정하는 민중신학 교단의 선언일 것이다.
과잉복지의 직접적 기원은 WCC신학 1968년 대회의 ‘인간화’선언인 것 같다. 민중신학 진영은 이러한 ‘인간화’ 문제를 48년 이승만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빚어지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민중계급의 소외와, 인간소외 복권으로서 노동해방을 지적한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전통적인 기독교가 끝난다는 지적이 많다. 그 외에 여러 저작에 반복해서 드러난다. 이는 본 회퍼의 ‘비종교적 해석’을 거론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념이 세계혁명을 지적해도 전 세계에 구현되지 않듯이, 본회퍼의 지적이 전세계에 무조건 적용될 것이며 한국에도 그러할 것이란 지적은 ‘뻥’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런 기반은 유유히 남는다.
세속사회에서 기독교가치를 구현한다는 것이 깔리고, 그 안에서 성경적 제한성으로 삼위일체 가치를 논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다. 기존 교회의 ‘선교’는 말씀의 전달인데 반해, ‘하나님의 선교’는 영과 육 전체를 전하는 것이다.
교회사는 80년대 민중운동은 ‘하나님의 선교’가 신학적 무기였다고 기록한다. 과연, 그럴까? 함석헌의 다원주의는 샤머니즘 다원주의요, 민중신학은 동학이 천주교의 토착화를 시도한 것에 반해 기독교의 토착화를 한다고 했다. (안병무 등 다수의 민중신학 서적 참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교’(삼위일체 선교)가 한국 사회에 실체는 무속 샤머니즘의 脫魂忘我의 接神(엑스타시) 상태가 진실이다. 고로, 화염병 던지는 순간이 1980년대 민중신학에서는 기독교가치가 성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1988년 KNCC선언은 메시아적 통일소망주의와 종북 체제건설 차원의 좌표를 설정한 문건이다.
http://blog.chosun.com/litdoc/6525807
이 선언은 ‘경제민주화’와 ‘성장’, 뿐만 아니라 ‘복지’등 갖가지 유토피아적 상태를 통일과 연관하여 설정한다. 글의 배후에는 ‘월북자가족’으로 설정되는 反共에 적대적이며 親北에 친화적인 집단이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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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 |
실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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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화 (wcc 68 대회) |
친북좌파 이기주의의 절대적 구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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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교(미쇼데이) |
천도교 내장된 무속정서의 탈혼망아 상태 -화염병 던지는 상태에도 기독교가치라 말함이 가능함 |
사실, 전통적 의미의 복지는 포디즘 시대에 끝이 났다.
엘리트는 전지전능하지 않고, 그리고 복지는 지속가능성이 늘 의심돼 왔다.
그러나, 한국은 단 한번도 복지를 제대로 된 복지를 구현해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너무 늦게 시도한다.
과잉복지를 수정하려면, 엘리트가 ‘원래’(즉, 집권 여당의 실수가 아니라) 전지전능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성서적 복음주의 신앙의 사회문화가 토대된 자유주의가 중요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국에서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경제학자는 토착화신학에 붙어서 움직이며, 기독교와 거리를 갖는다.
사실, 지금은 냉정하게 평생 직장이 아니라 15년 직장.
서비스업은 여성이 독식. 막노동 하기엔 위험률 과잉.
과잉 복지라고 기업가 입장에 초점을 맞추기에는,
공적 윤리로 채우면 겨우 국민의 양보가 가능할까,
살기가 팍팍한 것은 분명하다.
특히, 기업가나 관료의 입장에 딱 달라붙는 용어는, 살기 어려운 서민들의 입장에서 졸라 서러운 용어일 수 있다. ‘과잉 복지’라니.... 사실, 인간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우치는 문화를 모르는 국민에겐, 정말로 조선조 중세 속에 이미 감정이 가 있고 더럽게 서러울 수 있다.
국민에 타협기제가 전혀 없는데, 보수 사회는 군사정권 권위주의 시대를 잊지 않는 할아버지를 기반으로 힘의 정치를 하는 것은 가능한가?
군사정권의 권위주의와 민주팔이의 메시아적 소망주의는 모두 동학이 개입됐다. 심리적 구조가 같기 때문에, 한 입으로 두 포지션을 하는 것이 취하는 사람에선 가능할 수 있다. 과연, 당하는 사람에서도 그러한가?
김무성 등 ‘상도+동교’를 아우르는 진영을 배후에서 지원한 ‘민중신학’에 내장된 메시아적 통일소망주의가 부정되지 않는 한, 국민의 엘리트 의타주의는 메시아적 통일소망주의 안에서 자연스러울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국가개조 할 때, 새민련이 민중신학 깔아놓은 것에 포획된 국민정서 안에서 아주 크게 대박 쏴 버리면 어찌할 건가? 몇 년 뒤에 다시 개혁 이전으로 다 돌아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요약)
1) 과잉복지는 인기영합주의가 아니다. 국회 마피아가 믿는 민중신학의 메시아적 통일소망주의안에 포획된 국민감성의 자연스러운 발로다.
2) 메시아적 통일소망주의는 국민의 의타주의를 강화하여 자기 책임의식(자유의식)을 최하로 떨어뜨린다.
3) 국회마피아가 주도하는 문화 안에서, 권위주의 정권을 기억하는 장년층만 믿고 개혁하다간 국민 역풍 받기 십상이다. 개혁하려면 국회마피아 신앙이 전체주의적으로 반영된 통일부 통일정책의 민중신학용어 전체적 수정을 포함하여, 우리사회 안의 민중신학 전체주의 문화를 전부 고침과 동시에 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