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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시작
사건은 한 교수의 양심선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건 당시의 사진)
1989년 3월 14일, 김창호 교수(영어영문학과, 당시 38세)는 1989학년도 후기 대학입시에서 부정사례가 있었다고 폭로했고,
학교 측이 이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990년 해직당했다가 2006년 참여정부에 의해 복직됐다)
한편, 입시부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동의대학교 총학생회는
1989년 3월 21일, 학교측의 해명을 요구하면서 총장실을 점거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농성을 했는데, 사건 당일인 5월 3일까지 계속되었다.
이병돈 총장 [ 1928~1995 ]
-1963년 한국인 최초로 남극을 탐사했다. 해양과학 분야에서 꽤 유명한 인물.
5월 1일 노동절이 되자 사건의 흐름이 바뀌게 된다.
부산수산대학교(현재 부경대학교)에서 노동절 기념집회를 마친 동의대생 100명이
가야국민학교(현재 가야초등학교) 앞에서 시위를 하고 대학으로 돌아가던 도중
근처에 있는 가야3동 파출소(현재 가야1치안센터)를 습격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5월 2일, 학생들은 경찰의 "총기난사"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고, 다시 파출소에 화염병을 투척했다.
시위진압 도중 경찰이 학생 8명을 검거하자, 학생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현장에서 근무중이던 부산시경찰청(현 부산지방경찰청) 기동중대 소속 사복전경 5명을 납치한다.
학생들은 납치한 전경 5명을 교내로 끌고 가서 감금하고 구타했다.
부산시경은 전경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학생들과 7번에 걸친 협상(5월 2일 오후 7시~ 5월 3일 새벽 2시)을 벌였지만 무리한 요구조건 때문에 결렬되고 말았다.
그날은 동의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일이었는데
총학은 유세장에 모인 학생들 앞에서 전경들의 눈을 가리고 무릎을 꿇린 후에 양심선언을 시킬 예정이었다.
해당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재빨리 구출작전을 준비한다.
문제의 중앙도서관 건물. 사건 발생장소는 7층.
새벽 5시 15분, 부산시경 산하 5개 중대 634명(650의 병력이 전경들이 갇혀있는 중앙도서관 건물로 진입했는데,
이때 학생들은 책걸상으로 바리케이드를 만들었고, 곳곳에서 화염병과 돌을 던지면서 저항했다.
(작전에 참가했던 경찰들의 증언에 따르면 쇠파이프를 던지는 학생들도 있었다)
경찰들은 가스탄으로 대응했고, 각 층마다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제거하면서 올라갔다.
(이때 건물 4층~6층의 소화전이 터지면서 물이 새어나왔다.)
경찰이 7층에 진입했지만, 이미 학생들이 바닥에 석유와 시너를 잔뜩 뿌려둔 상태였어.
하지만 방독면을 써서 냄새를 맡지 못했던 경찰들은 이곳도 소화전이 터졌다고 생각하고 계속 걸어갔다.
경찰이 7층 복도에 진입한 순간, 학생들이 화염병과 시너 2통을 던졌고, 8층으로 가는 문을 잠궈버렸다.
복도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고, 17명의 경찰이 불길 속에 갇혔다.
3명은 몸에 불이 붙은 채로 창문에서 추락사했고, 3명은 연기에 질식사했다.
나머지 11명은 현장에 도착한 동료들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중화상을 입었던 전경 1명이 결국 치료중 사망하고 만다.
(경찰관 4명, 전경 3명 사망)

사건 직후 연행되는 학생들
현장에 있었던 94명의 학생이 모두 체포됐고
검찰은 그중 71명을 구속하고 18명은 훈방시켰다.
(5명은 어떻게 됐는지 모름)
*재판 과정의 주요 쟁점
1.화재의 원인은 화염병이다?
1-1. 학생들의 주장: 화염병 때문에 화재가 일어난 것이 아니다. 경찰들의 실수로 화재가 일어났다.
1-2. 경찰 측의 반박
<유 회장은 ‘학생들이 경찰에 던진 화염병이 화재 원인이 아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말도 안된다고 손을 내저었다.
"내가 직접 수사를 했어요. 공정하고 세밀하게요. 당시 시너 7 대 휘발유 3의 비율로 섞은 화염병 원료와 화염병이 가득했습니다. 더구나 밀폐된 공간이었어요. 당연히 기화 가스가 실내에 가득 차지요. 나중에 2심 재판부에서 직접 시뮬레이션을 했는데 담당 판사가 직접 와서 확인까지 했습니다.” >
-"화염병 탓 아니라니? 말도 안돼" , 유병진 부산진경찰서 경우회장과의 인터뷰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3746
1심 재판부: 경찰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했다
2심 재판부: (화재실험 후) 학생들이 투척한 화염병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했다
2.경찰이 건물밖에 구조장비를 설치하지 않았다?
2-1. 학생들의 주장: 도서관 바깥에 구조장비 같은건 없었다.
2-2. 경찰 측의 반박
3.납치한 전경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3-1.학생들의 주장: 구타행위나 모욕행위는 없었다. 잘 먹이고 재워줬다.
3-2. 전경들의 증언
학생들은 재판 과정에서도 추태를 부렸다.
상황을 지켜본 경찰관들의 유가족은 분노했고, 일부 유가족이 대학생들의 가족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법원 문 앞에 드러누운 학생들의 가족
71명의 학생들 중 40명은 1,2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됐고 (6명은 먼저 상고를 제기했다가 기각당함)
1990년 6월 23일, 대법원은 나머지 25명의 상고를 기각하고 항소심 판결을 확정했다.
40명의 학생 중 28명도 상고를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이번에도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정성원도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화염병의 위험성이 전국에 알려졌고
1990년 일명 "화염병 금지법"이 제정되었다.
(정식 명칭은 "화염병 사용 등의 처벌에 관한 법률")
출처: 법제처 법령정보센터
그러나 1995년 김영삼 정부는 광복절 특별사면을 단행했고,
윤창호와 오태봉은 남은 형량을 면제받고 석방됐다.
2000년 8월 9일, 김대중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국무총리실 직속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이하 심의위)"가 출범했다.

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03013
2002년 4월 27일, 위원회는 동의대 사건 관련자 46명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한다고 발표했고
이들에게 평균 2800만원, 최고 500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출처: 중앙일보)
반면 경찰관 유족에게는 1190~1890만원의 보상금, 전경 유족에게는 368만원의 보상금이 전부였다.
당연히 여론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및 심의위원회" 공식 홈페이지)
(경찰측 반응)
(심의위원회 내부의 반응)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 김경동 서울대 명예교수, 노경래 변호사 등 3명이 사퇴
여당인 민주당도 몸을 사렸고
여론의 눈치를 보던 청와대도 반대했지만
(출처: 오마이뉴스 인터뷰)
심의위원회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2002년 6월 27일 경찰 유족들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2005년 10월 27일, 헌법재판소에서 5(각하) 대 4(위헌)의 의견으로 각하됐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유가족은 크게 실망했고
일부 유가족들이 외로운 투쟁을 계속했지만, 사건은 점점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갔다.
그대로 묻히는 듯 했던 동의대 사건은 2009년 3월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은 "동의대 사건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동의대 사건의 재심사를 추진하는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선언했다.

2월 27일, 전여옥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부산지부"의 이정이(66세) 대표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전여옥을 폭행하고 도주했다.
(2009년 5월 29일, 이씨는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음)
2009년 3월 2일, 전여옥은 동료 의원 12명의 서명을 받아 해당 법안을 발의했지만
민주당의 강한 반대로 폐기되고 말았다.
참가 의원 명단
순직 경찰들에 대한 보상이 무산되기 직전, 구원투수가 등장한다
그는 바로 경찰 출신의 한나라당 이인기 의원이었다.
(대구 수성경찰서 수사과장, 서울 관악경찰서 수사과장을 지냈음)
2009년 3월 26일 이인기 의원을 대표로 한나라당 의원 10명이 "동의대 사건 등 희생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자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참가 의원 명단
법안의 주요 내용
"동의대 사건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사업을 추진함(법률안 제5조)"
"국가는 희생자 중 사망한 경찰관 및 전경의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한다.(법률안 6조)"
이 법안 역시 민주당의 강한 반대로 국회에서 2년간 묻혀있었고
2011년 12월에야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에 의해서 경찰청은 순직 경찰 7명의 유족에게 1억 1400만~ 1억 270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2012년 대선 때는 모 의원의 불편한 과거가 드러나기도 했다.
(
그리고 2013년 5월 3일, 동의대 사건 25주년 추도식에서 순직 경찰 7인의 흉상이 공개되었다.
*사망자 명단
(서원석 수경의 사진은 없음)
박병환 경위(당시 37세)
= 유일한 기혼자. 이때 그의 아들은 겨우 8살이었다.
박병환 경사(당시 29세)
= 운동권이었지만 전향한 사례. 마약단속 등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약혼녀와의 결혼을 위해 매달 월급의 반을 저축하고 있었다.
정영환 경사(당시 27세)
= 그림에 제법 소질이 있었지만, 몇달 전에 그린 애인의 초상화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조덕래 경사(당시 25세)
= 시위를 진압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학생들의 화염병과 돌에 맞아 다치는 경우가 많았다.
김명화 수경(당시 22세)
= 매우 검소했다. 형의 결혼식에 참석할 때는 양복이 없어 동료의 옷을 빌려입기도 했다.
모성태 수경(당시 22세)
= 초중고 모두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집안사정 때문에 고교 졸업 후 바로 입대했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어머니, 빨리 군대 갔다와서 돈벌어 편히 모실게요"
서원석 수경(당시 24세)
=대학생 출신

철없던 아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되었다.

아들의 영정을 만지는 어머니
1.부정입학 문제로 시작된 사건이지만, 학생들의 잘못된 행동으로 경찰 7명이 순직
2.해당 학생들은 김대중 정부 때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고 거액의 보상을 받은 반면, 순직 경찰의 유족들은 인정받지 못했음
3.한나라당(현 새누리당) 국회의원 2명의 노력으로 사건이 재조명되었고, 마침내 경찰들의 희생이 인정받았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