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실제로 어떤 정답이 존재하고, 내가 아주 잘못된 경로로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물론 나도 종종 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떠올려보다가도 내 방식대로 삶을 사는 이유는, 사람마다 그 사람을 살게 만드는 어떤 각기 다른 원동력이나 고민의 연속성, 궤적의 연속성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거시세계에서 인식과 관측으로 점을 찍고 절단하여 세상을 바라보면, 언제든 경로를 확 비틀 수 있을 것처럼 아주 얇고 비실비실 가벼워 보이겠지만, 실제 경로는 인간의 정신과 사유 흐름, 무의식과 역사 속에서 연속적이고 그 연속적인 경로 다발과 고려들의 머나먼 태초, 온갖 의미와 맥락의 다발들이 뭉쳐져있는 아주 묵직한 뿌리가 있다.
그 뿌리를 뽑아내려고 하지 말고 내게 차라리 양분이나 비, 햇살 등을 내려주었으면 한다. 물론 지금은 아직 내게 충전된 힘이 남아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린다는 것 자체가 온갖 마찰의 리스크들을 감수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이제 내가 그런 것들에 일일이 욱해서 반응하고 해명하기에는, 그들의 인식과 시선이 너무 단정적이고 내 남은 생명력을 그런 곳에 불태우기에도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나 또한 타인들에 대해 단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절단면 자르듯 바라보지도 않으려고 늘 애쓴다
나는 내 남은 생명력을 어디다 불태울지 전부 정해두었다. 그러니깐 그것이 마지막으로 내 뿌리까지 인생의 나무 전체를 불태워 잠깐이나마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저 어둠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희미하게 밝히다가도, 결국은 다시 흐릿해져 그 다음의 불꽃에 미래를 맡긴 뒤 ㅡ스스로 해산하길 바라고 있다.
//
사람과 세상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고 단정짓는 것은 얼마나 간편하고 편안해지는 일인가? 그러나 그것을 철회하고 다시 관찰하고 고민해보는 일은 얼마나 지치고 어려운 일인가? 인간은 어째서 굳이 어려운 길을 나아가보려고 하고 애써 복잡한 질문에 자신만의 방식대로 고민을 해보며 경로를 탐색하려 드는가?
확실한 이유를 아직 나도 단언할 정도로 많이 살아본 건 아니지만, 무언가 자신이 몰랐던 것을 더 배우고 나아가보기 위함이라고 일단은 말하고 싶다. 그 끝에 지옥이 있든 허무가 있든 그런 건 알 바 아니다. 나는 과정과 경로를 기억하는 우주 내에서만 존재하며, 죽음은 주체에 의해 경험되거나 인식되는 어떤 '사건'이 아니라, 그저 기억이라는 실시간 정보가 뇌에서 그 기저인 우주로 압축&전이되는 망각-재기억의 실루엣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죽음은 정체불명이지만, 그 어둠은 정설대로 '아무것도 없어서' 어두운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무지,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가득차 있어서 우리의 유한하고 제한적인 시야에는 어두워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천문학계의 트롤러 쌍둥이인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도 마찬가지 아닌가? 나는 그 둘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녀석들인지 수학적으로는 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 머릿속에서 '없는 것'으로 치부되지는 않는다. 사후라는 것도 내게는 마찬가지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믿는다면, 또는 반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안다고 단호하게 확신한다면, 인생이 얼마나 뻔하고 따분하겠는가? 나는 무지를 여지로 환원해두는 것을 즐긴다. 그 아래에 수학이라는 틀을 짜두고 이리저리 움직여도 본다. 그것이 내가 미래를 미리 살아가는 방식이다.
//
나도 내 삶과 존재방식, 행동패턴 등이 어떤 취약점을 갖고 있고 주변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고려하며 산다. 그것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 할 일과 주변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타협점 또는 절충안을 늘 신경 쓴다. 그러나 사람의 에너지가 유한하고 하루에 온전히 집중해서 연구할 수 있는 시간도 예전보다 훨씬 줄어든 상황에서, 나에게 여러가지 서로 충돌하는 모순적인 요구 사안들을 들이미는 사람들이 계속 다가오려고 하면 나는 그저 도망칠 수밖에 없다. 대화만으로 좁혀지지 않는 인식의 차이가 있다. 시간이 지나야 그것이 맞물리기 시작한다. 뇌 구조도 다르고, 나는 내 장애있는 뇌의 사용을 최적화하기 위해 정말 애쓰며 사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 역시 그럴 것이다.
예외적인 인간을 위해 이해하고 신경써달라하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외면하던 예외가 언젠가 자신이 되어있을지 누가 아는가?
특수한 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위한 고려나 예외적 병균•자연재해에 대한 고려를 왜 굳이 애써서 인류가 해왔는가?
1. 그게 언젠가 자신 또는 주변 내 사람이 될 수 있으므로 보험 또는 미리 적응 및 공부용
2. 그것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여러 이론들이 개발되고 앎과 시야가 넓어진다.
나 또한 수많은 예외들을 삶과 관계 속에서 지켜보고 대책, 이론을 세우며 살아간다. 저마다의 괴롭고 지치는 경로에서, 아직 때에 맞지 않는 얽힘을 강제로 형성하려 들수록 그 반발감과 피로는 쌓이기 마련이다. 나는 어떤 일이든 다 때가 있다고 믿는다. 일단 해보고 나서 정 안 되면 때가 아닌가보다, 지금은 아닌가보다, 하고 먼 미래나 다음 생에 여지를 둔 뒤에, 다시 또 생각나면 또 해보고 자연스러운 시간 흐름에 솔직하게 응답하려고 노력한다.
영원한 이어짐이 없듯 영원한 단절도 없을 것이다. 죽음이 그 전에 관계와 재회, 다른 형태와 맥락 속 관계에 대한 가능성을 절단할지라도, 우로보로스는 결국 비슷해보이면서도 전혀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돌려준다. 그것을 재앙이라 볼 수도 있고, 선물이라 볼 수도 있다. 결국 모래시계는 모래가 전부 어두운 구멍에 빨려들어가고 나면, 반대로 뒤집혀서 다시 무한한 가능성과 역사 속에서 모래를 걸러낸다. 그것이 하나의 이야기로 계승되고 흔적이 된다.
나는 내가 괴로울 때 괴롭다는 이야기만을 적어두고 싶지는 않다. 다 괴롭다. 그러나 저마다 그 괴로움 속에서 배우고 느끼고 바라보고 그리는 것은 다 다르다. 그러니깐 나는 내 괴로움 속에서 내가 보는 것들을 세상에 내어놓는다. 그것이 세상에 언젠가 위로든 희망이든 시야든 앎이든 응용이든 쓸모가 있을지 어떨지, 그런 건 내가 미리 알 수 없다.
애당초 순수수학이나 이론물리하는 사람들이 쓸모 같은 걸 좆까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관찰과 이해가 이어져 온 것이다. 굳이 결론과 보상, 행복이 확실해야만 인간이 무언가를 해야 하는가? 그게 꽉 막혀보이고 답도 없어보이면 그 길을 걷는 사람은 개븅신뼉다구인가?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만약 나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거나 살게 될 사람이 있다면 나라도 그 사람의 편이 잠시라도 되어주고 싶다. 적어도 모질게 말하거나 다 안다는듯이, 다 이해한다는 듯이 단정짓는 듯한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
밥이라는 것은 내게 있어서 그 같은 편이 되겠다는 암묵적인 마음의 실천 또는 힘의 전달이 되어있다. 맞선임과 상사분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부모 또한 내게 그렇게 하셨다. 반대로 술을 산다는 것은 상대가 고생했을 때의 위로 표시인지도 모른다. 마실 것은 아주 짧은 약간의 시간을 함께 하는 일, 차 같은 것은 온기를 전달하려는 일, 퇴근 후의 아침 커피는 뇌를 깨우고 하루를 각자 재미있게 보내보자는 파이팅(원래는 자야 정상이지만 나랑 맞선임님은 아침에 퇴근하고 바로 안 잔다), 등등.. 다 주변에서 그저 말이 아닌 행동과 실천 속에서 전해받고 모방하기 시작한 마음과 의미들이다.
원래 나는 밥이나 술을 거의 얻어먹지 않고 싶어했었는데, 그때는 참 많이도 얻어먹고 다녔었다. 그게 다 마음의 빚이나 보답하지 못 했을 때의 죄책감 등으로 남을 줄 알아서 거절만 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분들은 무언가 바라고 사주시는 게 아니라 그냥 밥한끼 사고 마음 쓰고, 말만 아니라 실제로 뭔가 힘이 되고 싶어서 그러셨던 게 전부였던 것 같다. 다 주변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물려받은 선한 마음의 영향력이 아닌가 종종 생각한다. 누가 밥사주시면 나도 밥사고(몰래 계산하고) 커피 사고.. 정말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 사소해보이는 실천이 내게는 인간사에 대한 첫 신뢰이자 감동이었다. 물론 밥값이 하루 일당 정도 될 때에는 좀 타격이 크긴 하지만, 아깝다고 생각해본 적은 절대 없고 내가 주변에서 살면서 받아온 것이 훨씬 많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누구한테 전해지든, 사람한테서 받은 마음과 호의는 세상에 언젠가는 돌려주어야 한다고 느낀다. 그냥 내가 나 스스로 느끼는 마음이다.
그러니깐 나도 어느새 그런 식으로 마음을 전달하는 인간이 되어있다. 밥심이라는 말이 옛날에는 틀딱같고 싫었었는데, 지금은 그것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혼자서는 힘이 들고 지칠 때가 있다.
밥한끼 건강하게 맛있게 먹길 바라는 마음보다도 한국인의 사랑을 더 잘 표현하는 것이 따로 있을까?
내가 퇴사 후 고향에 내려가 먼 동네를 걷다가 문득 외할머니가 계신 댁이 생각나서, 순수하게 그냥 뵙고 싶어서 갑작스레 들렀을 때, 외할머니는 내 퇴사나 그 이후의 계획에 대해 전혀 묻지 않으시고 집밥을 한 끼 차려주셨다. 정말로 그날따라 유독 나에 대한 질문을 안 하셨던 것 같다. 외할머니가 어머니의 전화통화로 내 퇴사를 알고계셨던 걸 미리 알았고, 그래서 들어갈까말까 고민하다가 들렀던 것이다.
그 일이 기억에 많이 남아있다. 인생은 저마다 다르게 노력하며 살지만 밥은 결국 누구나 힘을 내기 위해 먹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할머니는 나에게 밥을 먹여주셨고 그것이 힘이 되고 기억이 되어있다.
물리적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기억은 내 안에 있다. 그래서 와닿는다. 언제든 꺼내볼 수 있다. 나는 부모님께서 내게 선물해주신 좋은 기억들도 아주 많이 머리에 담고 있다. 연구에 바쁘고 뇌가 아파서 자주 잊을 뿐이다.
반대로 슬픈 기억들은 최대한 덜 기억해두려고 한다. 내가 주변에 심은 슬픈 기억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뇌에서 최대한 좋았던 기억만 더 오래 남아 있기를 빈다. 아픈 기억들은 흐릿해져가길 빈다.
맞선임께서 나 마지막 출근 후에 술사주실 때, 내게 반복해서 하셨던 말도 비슷하다. 부족하고 섭섭하게 느끼셨던 순간들은 잊으시고, 되도록이면 이 장소 이곳에 좋았던 기억만 남기고 앞으로 잘 사시길 빈다고. 그건 섭섭하게 대했었다면 미안하다는 자기성찰과 돌아봄의 태도가 있는 사람만 가능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사람중에 정말로 타인을 섭섭하게 만들거나 부족하게 대하는 분들은 드물다. 그래서 인상깊었다. 맞선임으로부터 정말 배우는 것이 아직도 많다. 뒤늦게 눈치채고 알아채는 것들이 살면 살수록 정말 많다. 비슷한 상황에서 맞선임이라면 어떻게 하셨을 것인가 등.
//
구원은 결론이자 판단/선별/분리이지만, 희망은 과정이자 이어짐, 계승, 발전이자, 내 사후와 세계를 위한 여지, 가능성, 존중, 신뢰이다.
//
저번에 같이 일했던 반장님 방금 전화오셔서 받았음. 쉬는 기간에는 비행기 모드 켜놓는다고 하니깐 이해해주시더라. 콜라 마시는 중임. 안뇽 게이들아? 오늘 하루도 건강히 잘 보내. 아파도 나중에는 의미가 있을 거야.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