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박정희 사망 소식에 쾌재를 불렀다”
김문수(66) 전 경기도지사가 1979년 박정희 서거 직후 품었던 생각이다. 김문수 전 지사는 1970~1980년대 노동운동계의 대부(代父)였다. 노동계를 중심으로 한 반(反)박정희 투쟁의 선봉이었던 그는 1994년 보수여당 정치인으로 변신해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그의 반박(反朴) 투쟁은 경북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내에서 박정희의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주도하면서다. 그는 "당시 사회 교과서에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부정적으로 기술했음에도 박정희가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자 반감이 일었다"고 했다.
서울대 경영학과에 70학번으로 입학한 그는 학내 서클인 '후진국사회연구회'에 가입해 본격적인 학생운동의 길을 걷는다. 이후 청계천 피복노조 노동자들과 판잣집에서 노동법을 공부하며 의식화 교육에 전념했다.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해 대학에서 제적당하기도 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두 번째로 제적당한 그는 당국의 수배를 피해 도피생활을 이어가며 공장 대여섯 군데를 전전했다. 그때부터 그는 노동운동계의 실질적 리더로 떠올랐다.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있던 1979년 10·26사건이 터졌다. 그는 "박정희의 사망과 함께 사회주의 노선이 가속화될 것으로 기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학생운동 은사 격인 안병직 현 서울대 명예교수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도쿄대 교환교수로 갔던 안병직 교수가 일본에서 생각이 바뀌어 왔더라. 그간 나와 안 교수는 '자본주의 필망론'을 외쳤다. 하지만 도쿄에서 돌아온 안 교수가 '자본주의는 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노동운동 그만하고 딴 길을 찾으라는 충고도 했다."
그때 그는 안병직 교수를 '변절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1980년대 중후반, 그는 교도소에서 복역하며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볼셰비키 비판, 페레스트로이카(개혁)에 관한 글을 읽은 뒤, 사회주의 이념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출소 후에는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패망도 지켜보았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완전한 갈등에 빠졌다"고 말했다. 결국 1994년 민주자유당(자유한국당의 전신)에 입당해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한 달간 미국을 방문, '자본주의의 본산(本山)'을 경험한 뒤로는 완전한 '전향'의 길을 걷는다.
그에게 박정희란 인물이 새롭게 다가온 계기는 경기도지사(2006~2014)로 재임할 때다.
"도지사 시절 경기 북부 지역에 고속도로를 놔 달라고 중앙 정부에 요구했다. 생각해 보니 난 박정희의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했었다. 당시 경기도 일자리의 약 25%가 자동차산업과 관련된 것이었다. 나는 자동차산업에도 반대했었다. 내가 50~60대에 비로소 알았던 걸 박정희는 이미 1960~1970년대에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박정희 신도시(울산·구미·창원)는 토목공사 전문가들이 만든 신도시를 능가한다"며 높은 점수를 주었다.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도 "처음 시작됐을 땐 별것 아니라고 봤지만, 경쟁을 매개로 관민(官民)이 조화를 이뤄 농촌을 잘살게 만든 획기적인 운동"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박정희 지도력의 근원을 일본식 교육에서 찾는다.
그는 "군대라는 조직을 지휘한 경험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박정희의 '권위주의 독재'에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 공산주의와 대치하던 특수 상황, 잦은 선거로 인해 대두될지 모르는 포퓰리즘을 경계해 박정희가 유신(維新)을 단행했다는 의미다.
그는 "5000년간 우리 민족이 겪은 가난, 좌절, 절망을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신념화해 산업혁명을 이룬 박정희는 위인"이라며 "전향하기 전에는 박정희의 공과를 0:10으로 봤지만 지금은 8:2로 본다"고 했다. "압도적으로 공이 많은 인물"이란 말도 덧붙였다. 인터뷰가 끝났을 때 김문수 전 지사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동상을 최소 서울 광화문광장과 동대구역광장 두 군데엔 세워야 한다. 그것이 세계사적 위인에 대한 예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