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국의 국가적 목표는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이란 구호로 표현되었다.
1972년 5월 30일 朴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로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을 불렀다.
“임자, 100억 불 수출을 하자면 무슨 공업을 육성하지?”
吳 수석은 의아했다.‘지난 2월에 1980년도 수출목표를 50억 달러로 확정지었는데, 왜 갑자기 100억 불 이야기를 할까..’
吳 수석은 이런 때를 대비한 복안은 갖고 있었다.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다고 봅니다. 일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경제를 소생시키기 위한 첫 단계로 경공업 위주의 수출산업에 치중했습니다. 현재의 우리나라와 사정이 같습니다. 그 후 일본의 수출액이 20억 달러에 달할 때 중화학공업 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때가 1957년입니다. 그 후 10년이 지난 1967년에 일본은 100억 달러의 수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기계제품과 철강제품이 일본 수출의 主力(주력)상품이 되었습니다.”
吳 수석은 며칠 뒤 金正濂(김정렴) 비서실장과 함께 朴 대통령에게 100억 달러 수출을 위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보고했다.
“일본은 1957년 중화학공업 선언을 하고 10년 만에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습니다. 1957년에 일본은 산업구조상 중화학공업 비율이 지금의 우리나라와 같은 43%였습니다만 10년 뒤엔 78%가 되었습니다. 수출품목에서 차지한 중화학공업 제품의 비중도 1955년엔 41%였는데, 1967년엔 67%로 늘었습니다. 중화학공업 유치에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동남아 국가들보다 먼저 출발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현 시점이 중화학공업 진입의 마지막 버스를 탈 수 있는 기회입니다. 단순조립 공업은 임금이 올라가면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한국의 임금상승률은 대만을 앞지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만보다 더 빨리 중화학공업을 이룩해야 합니다.”
吳 수석의 이날 보고가 1970년대 한국의 가장 중요한 발전 테마가 되는 중화학공업 건설의 시작이었다.
이 大사업이 朴 대통령이 던진 ‘수출 100억 불’이라는 화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한국이 제조업 전반에 걸친 세계적 경쟁체제를 구축한 것은 1973~79년의 중화학공업 건설 덕분이다.


